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티무르 제국 (문단 편집) === [[샤 루흐]] 시대 === 대부분의 왕조가 그렇듯이 티무르 사후에 왕위상속을 놓고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티무르는 생전에 손자 피르 무함마드를 후계자로 임명했지만, 피르 무함마드는 티무르가 사망할 때 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에서 멀리 떨어진 발흐에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티무르의 또 다른 손자인 할릴 술탄이 권력을 잡았으나 피살되고, 뒤이어 티무르의 넷째 아들 샤 루흐가 지배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의 영역은 서투르키스탄에 국한되었고, 중부 이란의 이스파한과 쉬라즈 등지는 티무르의 둘째아들 우마르 셰이흐의 자식들이 지배했다. 그런가 하면 제국의 가장 서북부에 해당되는 서부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에는 투르크멘 계통의 유목부족들, 즉 잘라이르 왕조와 [[백양 왕조]](악크 코윤루), [[흑양 왕조]](카라 코윤루) 등이 독립해 있었다. 이 내분으로 나라 자체가 [[막장]]이 될 뻔 했으나, 이후 샤 루흐가 티무르 제국을 다시 통합했다. 샤 루흐는 자신의 근거지 [[헤라트]]를 중심으로 제국의 재건을 꾀했고, 중부 이란의 티무르 일족들도 그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흑양 왕조의 카라 유수프가 [[타브리즈]]와 [[바그다드]]를 점령하자, 샤 루흐는 1421~34년 세 차례 원정을 통해 그를 패배시켰다.[* 그러나 샤 루흐가 사망한 뒤 흑양 왕조의 세력은 다시 커져 1450년대에는 이스파한, 쉬라즈, 키르만 등을 모두 점거했다. 이들은 1460년대 후반 백양부 우준 하산의 공격으로 무너졌지만, 서부 이란은 여전히 티무르 왕조의 통제밖에 있었다.] 샤 루흐는 동쪽의 [[모굴 칸국]]에도 군사적 압력을 가해 1425년에는 아들 울룩 벡을 보내 원정을 감행했다. 다만 중국에 대해서는 아버지와 달리 평화적인 외교 관계를 모색하여 몇 차례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고 맞이하고 했다. 1413년 샤 루흐의 사절단은 북경을 방문하였고 이들이 귀환할 때 영락제는 진성과 이달을 헤라트로 파견했고, 이들은 1415년 귀환하여 『서역행정기(西域行程記)』와 『서역번국지(西域蕃國志)』라는 글을 남겼다. 1419~1421년에도 샤 루흐와 그의 아들 바이숭쿠르가 보낸 사신단이 명에 다녀갔는데, 이때 사신이었던 기야스 앗 딘 나카시는 당시 영락제와 화재를 입은 자금성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했다.[* 사신이 방문했을 때 막 지어진 [[자금성]]에 벼락이 내리쳐 궁궐이 불탔는데, 이를 보며 영락제가 "하늘이시여, 제가 뭘 그리 잘못했길래 이리도 가혹하게 구십니까!"라고 하늘에 울부짖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더불어 이들 사절단은 명나라의 광활함과 부유함, 역참제도를 비롯한 명나라의 행정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놀라운 점은 이들 사신단이 둘러본 지역은 어디까지나 강남지방에 비하여 낙후되었던 화북지역이라는 것이다.[* 다만 경제력은 강남이 앞섰지만 행정력의 촘촘함은 수도권이 위치한 화북이 앞섰다.] 역사가들도 샤 루흐의 시기를 진정한 전성기로 쳐주고 있으며, 유럽과 동방의 문물들을 받아들이고 이들 사이의 교역을 중계하면서 상당한 번영을 누렸다. 다만 샤 루흐 시대에도 티무르 사후의 혼란은 잦아들지 않았다. 당장 문서상 티무르 제국의 영토인데도 [[흑양 왕조]], [[백양 왕조]]가 흥기하여 서부 이란에서 쫓겨나는 등 샤 루흐의 명령이 서지 않는 지방도 적게나마 있었으며, 시도 때도 없이 반란이 일어나는 통에 그야말로 군대를 이끌고 순회공연을 다녀야 했던 것. 하지만 다행히도 샤 루흐는 군사적인 재능도 뛰어나 제국의 분열을 막아낼 수 있었지만, 1447년에 손자 무함마드가 페르시아 서부에서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도중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